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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회사에서 쳐내도 끝이 없는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 상사의 영혼 없는 지시에 시달리다 보면 기가 완전히 빨려 고무인형처럼 흐물거리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와도 온통 까칠해져서 소파에 쓰러지듯 눕기 바쁘죠. 며칠 전 평일 저녁이 딱 그랬습니다.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드러누우려는데 발끝에 무언가 툭 걸리더라고요. 다섯 살짜리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와 거실 바닥에 펼쳐놓고 간 낡은 스케치북이었습니다. 크레파스로 삐뚤삐뚤하게 그려진 그림 속에는 커다란 아빠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서툰 도화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는데, 일주일 내내 피곤하다는 핑계를 방패 삼아 "아빠 지금 바빠, 나중에 놀아줄게"라며 아이가 과자 부스러기 같은 손으로 잡아끄는 소중한 손길을 매정하게 밀쳐냈던 제 비겁한 일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목구멍이 턱 막혔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눈부신 순간들을 쓰레기통에 버려가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지독한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아이 방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숨소리를 들으며 먹먹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가슴 깊은 곳의 부성애를 건드렸던 이환경 감독의 영화 <7번방의 선물>이 떠올랐습니다. 아주 예전에 이 영화가 처음 개봉해 천만 관객을 모았을 때는 그저 관객들의 눈물샘을 영리하게 자극하는 뻔한 최루성 신파극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의 서툰 조름을 외면해 버린 현실의 찌질한 부모가 된 상태에서 방구석 혼자 다시 마주하니, 스크린 속 교도소 7번방의 풍경이 전혀 다른 결의 서글픈 떨림으로 제 심장을 사정없이 두드렸습니다.

이거 완전 약자에게 독박 씌우는 현대 사회 아닌가 싶어 보다가 피꺼솟할 뻔한 7번방의 서스펜스
영화는 6살 아이의 지능을 가졌지만 딸 예승이(갈소원 배우)를 향한 마음만큼은 그 그 누구보다 깊은 딸바보 아빠 용구(류승룡 배우)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 7번방에 수감되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립니다.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빠가 오직 딸을 보고 싶어 하는 그 처절하고도 순수한 마음 하나에, 7번방 방장과 흉악범 죄수들이 합심하여 예승이를 삼엄한 교도소 안으로 몰래 반입하는 상상 초월의 눈물겨운 소동극이 펼쳐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진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킹받고 동시에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지능이 낮은 용구를 세상의 잔인한 기득권 세력과 편견에 가득 찬 공권력이 사정없이 범죄자로 몰아가며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잔인한 조작의 무대였습니다. 글자도 제대로 모르는 그를 앉혀놓고 억지 자백을 받아내는 모습을 볼 때는 솔직히 개빡쳐서 입 밖으로 욕이 터져 나올 뻔했습니다. 약자를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칼날이 되어 약자의 목을 죄어오는 그 가혹한 현실을 보며 기가 완전히 빨려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그런데 이 킹받는 수뇌부들의 조작 기소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거 완전 우리가 사회조직이나 직장에서 흔히 마주하는 매운맛 현실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현타가 제대로 왔습니다. 문제가 터지면 윗선들은 쏙 빠져나가고 가장 힘없고 말 잘 듣는 부하 직원에게 대놓고 독박을 씌우는 비겁한 조직 논리들. 영화 속 용구의 억울함은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하게 짓밟히며 버텨내는 우리 현대인들의 지독하게 쓸쓸한 자화상이었습니다.
아빠라는 이름의 무거운 무게, 그리고 내 이중적이고 비겁했던 핑계들의 흑역사
영화 후반부, 용구가 하나뿐인 딸 예승이를 지키기 위해 결국 권력의 협박에 굴복하고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법정에서 거짓으로 자백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오열이 터져 나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아이가 안전하게 산다"는 그 처절하고 무거운 죽음 앞에서의 선택을 내리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용구의 무너지는 뒷모습을 보는데, 핏대를 세우며 거창한 사회 정의를 외치던 그 어떤 법정 드라마보다 훨씬 더 큰 돌덩이가 되어 제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과연 나는 내 삶의 거칠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 내 아이를 위해 저토록 나를 온전히 내던지는 진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자문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스크린 속 부녀의 절절한 사랑에 펑펑 눈물을 쏟고 있으면서도, 정작 제 현실 속 아이에게는 지독한 방관자이자 이기적인 부모였던 제 실제 흑역사가 오버랩되어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다 너희들을 위해서 돈 벌고 고생하는 거라며 통장 잔고 핑계를 대고 제 마음을 편하게 가두던 그럴듯한 방패 삼아, 아이가 진짜 원했던 '지금 내 곁에 머물며 눈을 맞춰주는 시간'을 매번 피곤하다는 이유로 귀찮게 여기며 미루어왔던 제 이중적인 태도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바보 아빠 용구는 목숨을 잃는 마지막 순간까지 딸과의 약속을 지키려 온몸이 부서져라 애쓰는데, 나는 고작 몇 시간의 개인적인 휴식과 안락함을 핑계로 아이에게 늘 약속만 남발하는 가짜 부모로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영화는 그렇게 현실에 치여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사는 우리 부모들의 나약한 인간 본성을 눈물겹도록 호되게 다그칩니다.
노란 열기구가 철조망에 걸려버린 디스토피아, 그럼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진짜 상식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용구와 예승이가 교도소 운동장에서 함께 만들어 하늘로 띄워 보낸 노란 열기구가 담장의 높은 철조망에 걸려 끝내 더는 날아오르지 못하고 멈춰 서는 순간입니다. 비록 현실의 가혹한 법은 계란을 무참히 깨뜨려 세상을 울렸지만, 훗날 자란 예승이가 법대생이 되어 아빠의 억울한 무죄를 받아내고 눈 덮인 교도소 마당에서 아빠와의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재판 장면은, 차가운 세상에 체해버린 우리 현대인들에게 뒤늦게나마 참았던 위로와 먹먹한 용기를 건넵니다.
배우들의 연기 구멍 1도 없는 미친 열연 덕분에 오랜만에 완전히 시간 순삭당하고 기가 빨려 나온 인생 영화였습니다. 인위적인 요약 기호를 모두 걷어내고 완벽한 스토리텔링 줄글로 이 감정의 궤적을 따라가니 가슴속 여운이 훨씬 진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내 맘대로 한 줄 평]
가장 순수하고 바보 같은 사랑으로 가장 잔인한 현실의 벽을 두드리는, 내 아이를 향한 비겁한 미안함을 사정없이 들춰내는 뜨거운 거울.
우리는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여전히 피곤에 찌든 얼굴로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무기력하고 팍팍한 하루를 시작할지 모릅니다.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 놀아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 바쁘고 귀찮다는 핑계로 뾰족한 잔소리를 뱉으며 타협하듯 살아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주 가끔은, 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칠해놓은 서툰 사랑의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엄중한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밤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곁에서 잠든 아이의 손을 꼭 쥐어준 채 미안하다는 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작은 마음의 여유만큼은 품고 살아야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보면서 용구가 12월 23일 예승이의 생일을 외우며 울부짖던 그 소름 끼치는 명장면에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여러분의 솔직한 관람 후기도 댓글로 나눠주세요. 오늘 밤은 아빠라는 이름의 무게와 소중한 가족 이야기로 밤새도록 따뜻하게 수다나 제대로 떨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