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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회사에서 치이고 인간관계에 환멸을 느끼던 날이 있었습니다. 내 앞가림하기도 벅찬데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어딨냐며, 애써 주변의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하고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온 날이었죠. 씻고 나와서 냉장고에 있던 캔맥주 하나를 까놓고 아무 생각 없이 넷플릭스를 뒤적이다가 영화 <변호인>을 틀었습니다. 사실 개봉했을 때 극장에서도 봤던 영화인데, 나이를 좀 더 먹고 현실의 쓴맛을 안 상태에서 방구석 혼자 다시 보니까 신기하게도 첫 장면부터 가슴이 쿵쾅거리더라고요. 이미 결말을 뻔히 다 아는데도 후반부 법정 신에서는 맥주캔을 내려놓고 침대를 쾅 치며 몰입하게 만드는, 진짜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합니다.

120원짜리 요트와 돼지국밥, 그리고 자꾸만 겹쳐 보이는 지금의 우리 모습
영화 초반에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료 변호사들에게 대놓고 무시당하던 송우석(송강호 배우)이 탁월한 사업 수단으로 부산에서 제일 잘 나가는 세무 변호사로 성공하는 과정은 참 통쾌하면서도 씁쓸합니다. 나중에 조선일보랑 호화 요트 언론플레이로 법정 싸움까지 가게 되는 그 유명한 120만 원짜리 소형 요트 에피소드나, 고시생 시절 돈이 없어 밥값을 떼먹고 도망쳤던 국밥집을 성공한 뒤에 다시 찾아가 돈을 갚는 장면은 실제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라 그런지 가슴에 더 와닿았습니다. 대리석이 번쩍이는 새 아파트를 계약하고 가족들과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는 송우석의 얼굴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가족 등 따습고 배부른 게 최고다"라며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혀를 차며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지금 현실에서 부동산 가격이나 주식 계좌 잔고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제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뜨끔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평탄하고 부유한 삶을 살던 그가 단골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 진우(임시완 배우)를 만나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뀝니다. 진우의 모티브가 된 실제 고호석, 송병곤 선생님의 일화처럼, 1981년 발생한 공안 조작 사건인 '부림사건'의 잔인한 민낯을 마주하게 된 것이죠.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온몸이 피멍이 들도록 고문당해 "5월 16일 대전역에서 벚꽃을 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자백을 강요당한 아이들을 본 순간, 송우석은 편안한 꽃길을 제 발로 차버리고 지옥 같은 법정 싸움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저라면 과연 내 밥그릇과 가족의 안위를 다 걸고 저렇게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무서워서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을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송우석의 눈빛 변화는 "당신은 지금 괜찮게 살고 있느냐"라고 제 비겁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아 영화를 보는 내내 콜라만 연신 들이켰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것, 내 부끄러운 직장 생활의 기억들
영화 후반부에 공권력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홀로 선 송우석에게 고문 경감 차동영(곽도원 배우)이 "네가 지금 바위로 계란 치기 하는 거다"라며 비웃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송우석이 핏대를 세우며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기고, 계란은 아무리 약해도 살아있는 기라예. 바위는 부서져가 모래가 되지만, 계란은 깨어나서 그 바위를 넘습니다"라고 외치는데, 솔직히 소름이 쫙 돋으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습니다. 당시 실제 공안 검사였던 이들이 군사정부 이후에도 요직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던 역사의 씁쓸한 뒷이야기를 알고 나니 이 외침이 더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동시에 제 과거의 흑역사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직장에서 윗사람들의 명백한 잘못으로 억울하게 독박을 쓰고 퇴사 위기에 처한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나서봤자 바위에 계란 치기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넘어간다"라며 철저하게 외면하고 침묵했었습니다. 내 밥줄이 끊길까 봐 덜덜 떨며 비겁하게 모른 척했던 그날의 기억이 법정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송우석 변호사의 당당함 앞에 오버랩되면서 온몸이 찌릿하고 부끄러워졌습니다. 우리는 늘 바위가 무서워 계란이기를 포기한 채 죽은 모래처럼 살아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99인의 변호사, 지독한 무기력증을 날려버린 묵직한 여운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은 역시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법정에서 온 힘을 다해 포효하는 순간입니다. 실제 부림사건 공판에서 일어났던 에드외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금서 논쟁 고증을 그대로 살린 이 날카로운 일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묵직한 카타르시스를 줍니다.
그리고 영화의 진짜 하이라이트는 19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추모 시위로 인해 피고인 자리에 서게 된 송우석의 마지막 재판 장면이었습니다. 실제 노무현 변호사의 구속적부심사 당시 부산 지역 변호사들이 공동변호인단을 꾸렸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면이죠. 김광일 변호사의 평전 기록처럼, 재판장이 출석한 변호인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할 때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원로 변호사들까지 "나도 출석했소"라며 한 명씩 일어나는 모습을 볼 때는 진짜 온몸에 소름과 전율이 일었습니다. 결국 바위를 넘어서는 건 완벽한 영웅 한 명이 아니라, 상식을 믿고 곁을 지켜준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용기들과 연대가 모였을 때라는 걸 똑똑히 보여주니까요.
리뷰를 마치며, 오늘도 치열하게 버텨낸 우리 모두에게
영화가 다 끝나고 엔딩 작막이 올라가는데 방 안의 불을 켤 엄두가 안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맥주는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죠. 실제 이 영화를 만들고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배급사는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아야 했고, 배우들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작품 제안이 끊기는 혹독한 후폭풍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 현실의 장벽 속에서도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와 천만 관객의 가슴을 울렸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계란의 승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 줄 공감
내일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저는 또 현실과 타협하며 무기력한 표정을 짓고 있겠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작은 불씨 하나쯤은 품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의 마지막 99인 변호사 호명 장면을 보며 어떤 감정이 드셨나요? 댓글로 솔직한 생각을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