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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윗사람들의 알량한 권력욕이나 줄타기 싸움에 지쳐 기가 완전히 빨리는 날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온갖 번지르르한 정의를 떵떵거리며 외치면서 뒤로는 제 잇속 챙기기 바쁜 가짜 리더들에게 호되게 시달리다 보면, 누가 무슨 좋은 말을 해도 냉소적인 눈으로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온몸에 날이 선 채로 주말 저녁 방구석에 대충 누워 있다가, 무심코 넷플릭스를 켜서 예전에 극장에서 가볍게 웃으며 봤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다시 틀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연기 구멍 1도 없는 대배우들이 나와 도파민을 터뜨려 주는 영리한 가상 역사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가짜들이 판치는 현실 조직 사회를 온몸으로 겪어본 뒤 혼자 조용히 다시 꺼내 보니, 스크린 속 풍경이 완전히 다른 결의 전율이 되어 제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화려한 연출 속에 숨겨진 진짜 인간의 탐욕과, 역사라는 잔인한 거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씁쓸한 현타에 대해 날 것 그대로의 솔직한 감정들을 털어놓아 볼까 합니다.

상참의와 매화틀의 생생함,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거대한 역사적 착각과 킹받는 진실
영화는 독살 위협에 시달리던 광해군이 자신과 똑 닮은 만담꾼 천민 하선(이병헌 배우)을 대역으로 앉히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립니다. 첫 장면부터 왕의 조회인 상참의나 배변 틀인 매화틀까지 조선 왕의 내밀한 일상사를 기가 막히게 세세한 동영상으로 담아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요. 이렇게 고증이 잘된 배경 속에서, 천민 출신 하선이 대동법 확대를 반대하는 사대부들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치는 명장면을 볼 때는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새벽에 노트북으로 진짜 역사 사료들을 검색해 보다가 묘한 배신감과 함께 뒷목을 잡았습니다. 영화에서는 마치 광해군이 백성을 끔찍이 아끼는 성군이었던 것처럼 각색되었지만, 실제 역사 기록 속 광해군은 대동법 확대 시행을 본인 스스로 그다지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사건건 반대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쓸데없는 궁궐 중건에 무리하게 집착하며 백성들을 극심하게 수탈해 온 동네의 원망을 샀던 게 진짜 팩트라더군요.
영화 속 하선의 따뜻한 눈빛에 속아 실제 역사도 저랬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던 제 무지함에 현타가 제대로 왔습니다. 자극적인 편집과 발췌된 짤방에 속아 가짜를 진짜라고 오해하고 마는 오늘날 우리의 얄팍한 시선이 영화 속 미화된 연출과 겹쳐 보여 입안이 씁쓸해졌습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부들의 눈치 싸움, 그리고 내 부끄러운 직장 생활의 줄타기 기억들
작중에서 또 하나 제 뼈를 때리다 못해 순살로 만들었던 부분은, 지는 해인 명나라에 군사를 파병해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신하들과의 갈등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이들이 나라를 망치는 무능한 꼰대 기득권처럼 그려지지만, 당시 임진왜란 직후의 상황을 보면 명나라가 국가 예산의 20%를 퍼부어 조선을 구원해 준 직후였습니다. 조선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대국을 배신하고 전력으로 돕지 않는 왕의 스탠스가 오히려 의리 없고 위험한 도박으로 보였을 법한, 나름의 묵직한 명분이 있었던 셈이죠.
이 사대부들이 전세를 살피며 주판알을 튕기는 눈치 싸움을 보는데, 문득 제 직장 생활의 아주 찌질하고 부끄러운 흑역사가 오버랩되어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몇 년 전 회사에서 윗선들의 명백한 이권 다툼과 부당한 라인 타기 싸움이 벌어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 역시 옳은 소리를 하던 동료가 억울하게 독박을 쓰고 밀려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기서 줄 잘못 서면 내 밥줄 끊긴다", "나만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넘어간다"라며 철저하게 외면하고 비겁한 침묵을 선택했었습니다.
내 안위와 통장 잔고만 지키느라 불의 앞에 눈을 감았던 그날의 비겁함이, 영화 속에서 허균과 박충서 사이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줄 서던 조정 관료들의 모습 앞에 사정없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거창한 교과서적 훈계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현실의 이익 앞에 무릎 꿇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우리 현대인들의 나약한 인간 본성을 사정없이 후려칩니다.
아미산 굴뚝과 워프하는 경복궁의 옥에 티, 그럼에도 가짜가 진짜를 위로하는 밤
사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이 영화는 오류와 옥에 티 천지입니다. 광해군 시절에는 허물어져 쓰이지도 않았던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이 배경으로 불쑥 등장하고, 궁궐 후원으로 달려가던 왕과 중전이 갑자기 전주의 경기전으로 공간 이동을 하기도 합니다. 철저한 역사 재현이라기보다는 영상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잘 짜인 하나의 웰메이드 판타지인 셈이죠. 도승지 허균을 당상관 품계인데도 '대감'이라 부르거나, 종2품 상선 내관에게 허균이 함부로 반말을 뱉는 것도 실제 계급 사회의 법도와는 어긋나는 허구적 연출입니다.
하지만 이런 왜곡과 고증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제 인생 영화 등극급의 묵직한 여운을 남긴 이유는, 우리가 현실 사회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짜 리더십의 무게'를 하선이라는 천민을 통해 대리 만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짜 광해군은 인격적 결함으로 국정을 망친 왕이었지만, 영화는 "진짜 왕이라면 백성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줄 알아야 한다"라는 현대인들의 간절한 결핍을 정확히 관통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가짜 왕의 임무를 끝낸 하선이 배를 타고 멀어지고 이를 바라보던 허균이 먼발치에서 고개를 숙여 깊은 절을 올리는 장면에 이르면, 시간 순삭당하듯 흘러간 상영 시간이 무색할 만큼 가슴속에서 먹먹한 통곡이 왈칵 밀려옵니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그 가짜가 남긴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차마 스크린을 끄지 못하게 만들죠.
[내 맘대로 한 줄 평]
성군의 판타지라는 역사적 왜곡 속에서, 기회주의자들의 줄타기에 지친 현대인이 가장 듣고 싶었던 진짜 리더의 위로를 발견하는 씁쓸한 거울.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저는 또 변덕스러운 직장 현실과 타협하며 영혼 없는 미소를 짓고 있겠지만, 적어도 제 마음속 한구석에는 하선이 보여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예의'만큼은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보면서 하선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비판하며 호통치던 그 소름 끼치는 명장면에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솔직한 관람 후기를 나눠주세요. 오늘 밤은 차가운 폰 잠시 내려놓고 진짜 리더십과 우리들의 조직 생활 얘기로 밤새도록 수다나 제대로 떨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