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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앞에서는 커리어 관리 잘하는 프로 직장인인 척, 매사 이성적이고 차분한 척 다 하며 살아갑니다. "회사 일은 일일 뿐이야, 감정 낭비하지 마"라며 후배들에게 대범한 조언을 건네기도 하죠. 하지만 정작 프로젝트 마감 직전이나 인사고과 시즌이 되면, 메신저로 오가는 은밀한 줄타기와 성과 압박에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내 밥그릇 하나 지키겠다고 사내 정치판의 기류를 살피며 전전긍긍하는 내 안의 찌질함을 대면할 때마다, 말로 다 못 할 지독한 현타와 무기력감이 밀려오는 게 평범한 우리들의 씁쓸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성과에 대한 광기와 인간관계의 피곤함에 뇌가 통째로 타버릴 것 같던 날 밤, 무거운 마음을 달래려 노트북으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틀었습니다. 처음에 이 영화가 극장에 걸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때는, 그저 핵폭탄을 발명한 천재 과학자의 위대한 연대기나 시각적 도파민을 채워주는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명작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조직의 잔인한 암투 속에서 영혼이 짓밟혀본 쓴맛을 제대로 경험하고 나서 방구석에 혼자 누워 다시 꺼내 보니, 스크린 속 연구소의 풍경이 단순히 먼 나라 과학자의 역사가 아닌 묵직하고 서늘한 전율이 되어 제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이거 완전 우리 조직 내의 줄타기 판판 아닌가 싶어 보다가 뒷목 잡을 뻔한 '로스 Alamos' 연구소의 암투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해 미국의 천재 과학자들이 총집결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와 그 중심에 섰던 제이 로버트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배우)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각도로 조명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진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킹받았고 동시에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인류의 운명을 바꿀 거대한 과학적 성취를 이루어가는 과정 이면에 자리한 '조직 내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정치권력의 추악한 줄타기 암투였습니다. 특히 오펜하이머를 질투해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끝내 그를 공산주의자 밀정으로 몰아 사상 검증 청문회라는 파국으로 끌고 가던 루이스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배우)의 교묘한 공작을 지켜볼 때는 기가 완전히 빨려서 숨이 턱 막혔습니다.
겉으로는 국가 안보와 애국심이라는 번지르르한 명분을 떵떵거리며 외치지만, 알맹이는 오직 사적인 자존심 싸움과 내 권력을 지키기 위한 조작으로 점철된 인물들의 눈치 싸움은 참 기가 차고 가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숨 막히는 진흙탕 싸움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거 완전 우리가 매일 출근 전쟁을 치르는 빌딩 숲 속의 현실과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안이 씁쓸해졌습니다. 한 동료가 뛰어난 성과를 내면 축하해 주기는커녕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은밀하게 소문을 퍼뜨리거나, 라인을 잘못 섰다는 이유로 한순간에 프로젝트에서 배제해 버리는 직장 내 정치질의 매운맛 현실. 영화 속 매카시즘의 광풍은 가상의 대본이 아니라, 자본주의 조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가면을 쓰고 버텨내는 우리 현대인들의 지독하게 쓸쓸한 자화상이었습니다.
천재의 고뇌 뒤에 숨겨진 내 비겁했던 침묵의 순간들, 그리고 나약했던 과거의 고백
영화 후반부, 마침내 트리니티 테스트에 성공해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되고 세상의 환호성을 받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만든 파멸의 괴물이 가져올 비극적 미래 때문에 독기와 불안에 휩싸여 환각을 보던 오펜하이머의 그 불안한 눈빛은 관객들에게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찢어지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발을 굴 구르는 대중의 열광 소리가 원자폭탄의 굉음과 비명으로 변해 들리는 감정의 과부하 장면을 보는데, 제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 오면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처절한 양심의 가책 앞에 제 과거의 아주 찌질하고 부끄러운 흑역사가 오버랩되어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직장에서 수뇌부들의 이권 싸움과 부당한 성과 가로채기 때문에 한 동료가 한순간에 독박을 쓰고 밀려나던 파국의 기로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 역시 "내가 나선다고 뭐가 바뀌겠어", "라인 잘못 탔다가 내 밥줄 끊기면 어쩌나"라는 이기적인 공포와 사소한 안위를 핑계 삼아 철저하게 외면하고 비겁한 침묵을 선택했었습니다.
내 통장 잔고와 안위만 챙기느라 동료의 눈물을 모른 척했던 그날의 비겁했던 방관이, 과학과 정치의 잔인한 암투 속에서 덜덜 떨며 자책하던 오펜하이머의 서글픈 눈빛 앞에 사정없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영화는 거창한 도덕책을 늘어놓으며 정의롭게 살자고 훈계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이익과 조직 내의 시기 질투 앞에 너무나도 쉽게 양심을 접어두고 도망치는 우리들의 뼈를 사정없이 때리다 못해 순살로 만들어 버립니다.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남긴 씁쓸한 마침표, 우리가 진짜 마주해야 할 내면의 불씨
이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오펜하이머의 화려한 과거 연대기와 스트로스의 추악한 청문회 과정이 컬러와 흑백의 비정형적인 화면 배열로 엇갈리며 전개되다가, 결국 두 사람 모두 조직의 일회성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파국의 순간들입니다. 거대한 국가 권력이라는 장벽 앞에서 천재 과학자의 신념도, 탐욕스러웠던 정치인의 권모술수도 결국 다 부서져 버리는 마지막 마침표를 마주할 때, 방 안의 불을 켤 엄두가 안 나서 식어버린 커피를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악당을 시원하게 처단하는 통쾌한 팝콘 영화의 결말이 아니기에, 영화가 주는 여운은 상영 시간 내내 숨이 막힐 만큼 길고 따가웠습니다. 작은 불의를 모른 척하고, 내 주머니와 성과만 안전하게 지키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이기주의의 괴물이 되어 타인을 시기하고 방관하기 시작할 때, 우리 삶의 소중한 상식과 인간에 대한 예의도 서서히 빼앗기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던집니다. 인위적인 요약 기호를 모두 걷어내고 완벽한 스토리텔링형 줄글로 자본과 권력의 가혹한 궤적을 따라가니 가슴속 울림이 더 진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내 맘대로 한 줄 평]
성과와 질투라는 잔인한 칼날을 쥔 채 서로를 짓밟으며, 조직 중심의 세상 속에서 영혼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위선과 본성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서늘한 거울.
우리는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여전히 피곤에 찌든 얼굴로 스마트폰을 보며 누군가의 성과에 은근히 샘을 내고, 사내 단톡방의 눈치를 살피며 무기력한 하루를 시작할지 모릅니다. 또다시 윗선의 변덕스러운 지시 앞에 영혼 없는 미소를 지으며 타협하듯 살아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내가 긋고 있는 그 시기와 질투의 선이 누군가의 영혼을 사정없이 찢어놓는 폭탄이 될 수 있다는 엄중한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밤만큼은 내 안의 찌질한 성과 강박을 내려놓고 내면의 따뜻한 상식을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음의 여유만큼은 품고 살아야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보면서 스트로스가 마지막에 청문회 낙방 통보를 받고 피꺼솟하듯 분노하던 순간이나,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가 연못가에서 나누던 그 소름 끼치는 명장면에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여러분의 솔직한 관람 후기도 댓글로 남겨주세요. 오늘 밤은 폰 내려놓고 우리들의 씁쓸한 직장 생활과 시기 질투 얘기로 밤새도록 시원하게 수다나 제대로 떨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