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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도심 한복판의 숨 막히는 공기에 숨이 턱턱 막히고, 모니터 화면 속 엑셀 숫자 파일들을 보며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영혼을 갈아 넣고 있나" 자괴감이 몰려오던 평일 새벽이었습니다. 직장 상사의 영혼 없는 지시와 인간관계의 피곤함에 기가 완전히 빨려, 당장이라도 가방을 싸서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날이었죠. 속이 타들어 가는 마음에 편의점에서 사 온 매운 불닭볶음면 한 그릇을 억지로 비벼놓고, 멍하니 노트북을 켜서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작품이 바로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였습니다.

    예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연기 구멍 1도 없는 배우들이 나오는 풍경 예쁘고 정갈한 삼시 세끼 대리 만족용 만화 같은 작품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 안의 지독한 무기력증과 번아웃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방구석 혼자 다시 꺼내 보니, 스크린 속 주인공 혜원(김태리 배우)이 고향 집 문을 열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는 첫 장면부터 신기하게도 제 심장을 사정없이 사정없이 후려치더라고요. 정형화된 평론가의 딱딱한 명조체 어조는 다 치워버리고, 일상에 체해버린 평범한 인간의 시선으로 이 정성스러운 영화가 남긴 깊은 힐링과 서글픈 위로의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합니다.

     

    리틀 포레스트 광고 포스터
    리틀 포레스트 광고 포스터

    이거 완전 내 얘기 아닌가 싶어 보다가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찢어질 뻔한 도망자들의 자화상

    영화는 임용고시 낙방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끼니를 때우며 버텨내던 고단한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 시골집으로 불쑥 도망쳐 내려온 혜원의 이야기로 본격적인 계절의 궤적을 따라갑니다.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는 그녀의 투박한 말처럼, 혜원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눈 속에 파묻혀 있던 하얗게 얼어붙은 배추를 뽑아 뜨끈한 배추 전을 지글지글 부쳐 먹으며 스스로를 먹이기 시작하죠. 저는 이 영화에서 혜원이 삼색 떡을 쪄내거나 친구들과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서서히 마음의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요리의 전 과정이 참 아련하면서도 기가 완전히 빨려 들 정도로 고독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혜원의 귀향은 낙오이자 철저한 패배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매일 출근 전쟁을 치르고 숨 막히는 사내 정치에 시달리며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증발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하죠. 저 역시 작년 여름, 공들였던 큰 프로젝트가 완전히 어그러지고 인간관계까지 바닥을 쳤을 때 일주일 동안 모든 연락을 끊고 방구석에 숨어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아 현타가 제대로 와서 편의점 도시락이나 주워 먹으며 제 자신을 학대했었는데, 영화 속 혜원은 도망쳐온 그 쓸쓸한 시골집에서 오히려 묵묵히 밭을 일구고 사계절의 정직한 온도를 온몸으로 견뎌냅니다. 단순한 줄거리 요약을 넘어 자연의 순리대로 심고 기다리는 그 고요한 과정 자체가, 돈 중심의 팍팍한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영혼 없는 삶을 조용히 꾸짖는 것 같아 묘하게 뼈를 때리다 못해 순살로 만드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보내준 묵은 매실청 한 모금에 왈칵 쏟아진 눈물, 그리고 내 부끄러운 미룸의 기억들

    영화 속 수많은 음식 중에서도 제 마음에 가장 송곳처럼 날카롭게 날카롭게 와닿았던 명장면은, 혜원이 한여름 밭일 끝에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켜던 밤조림과 매실청 에피소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야 진정한 단맛을 내는 밤조림처럼, 그리고 엄마의 서툰 흔적이 가득 담긴 매실청을 마시며 엄마에 대한 원망을 뒤늦게 이해로 바꿔가는 혜원의 눈빛을 보는데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 오며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습니다.

    동시에 스크린 속 혜원의 뜨거운 자각 앞에, 제 현실 속 비겁하고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던 흑역사가 오버랩되어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뜬금없이 스마트폰 메신저로 오타 가득한 서툰 글씨로 "밥은 잘 먹고 다니냐"며 직접 담근 매실청 택배 박스를 보내주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직장 업무가 너무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를 방패 삼아 성의 없는 짧은 답변 한 통만 남겨두고 바쁘게 넘겨버렸죠. 나중에 한참이 지나서야 내 안위와 회사 생활 챙기느라 부모님의 쓸쓸한 안부를 매번 귀찮게 여기며 방관해 왔던 제 모순적인 태도를 깨닫고, 혼자 방 안에서 엉망진창으로 엉망진창으로 다 식어버린 배달 음식을 먹으며 펑펑 울었던 서글픈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 속 요리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홀대했던 도시에서의 상처를 치유하는 약인데, 나는 왜 정작 나를 지탱해 주던 소중한 마음들을 늘 가짜 다짐으로 미뤄두고 살았나 싶더라고요. 영화는 그렇게 진짜 중요한 가치를 잊고 사는 우리들의 나약한 본성을 사정없이 매섭게 다그칩니다.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우리들이 숨겨두어야 할 진짜 나만의 작은 숲

    영화는 아주 기적 같은 성공이나 대단한 해피엔딩을 보여주는 대신, 다시금 겨울을 무사히 보내고 한 뼘 더 단단해진 혜원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조용히 고향 집의 문을 다시 열어두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가 됩니다. 자극적인 반전이나 피비린내 나는 빌런의 소탕은 전혀 없지만, 상영 시간 내내 제 안의 메마른 감성을 아주 부드럽고 묵직하게 채워준 웰메이드 인생 영화였습니다. 차가운 현실의 번아웃에 심하게 체해버린 우리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정성스러운 연고를 발라주는 기분이랄까요. 인위적인 요약 기호를 모두 걷어내고 완벽한 스토리텔링형 줄글로 사계절의 순리를 따라가니 가슴속 울림이 훨씬 진하고 오랫동안 감돕니다.

    [내 맘대로 한 줄 평]
    성공이라는 가짜 신기루를 쫓아 달리다가 체해버린 현대인들에게, 내 손으로 정성껏 차려내는 밥 한 끼의 온기로 스스로를 진짜 구원하는 법을 알려주는 정성스러운 처방전.

    우리는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여전히 피곤에 찌든 얼굴로 스마트폰만 바라보며 무기력하고 모진 하루를 시작할지 모릅니다.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 내 주머니 채우는 일에 골몰하며 나 자신을 홀대하고 타협하듯 살아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주 가끔은, 도망치는 것도 다시 일어서기 위한 소중한 아주 작은 준비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밤만큼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내 영혼의 허기를 채워줄 따뜻한 물 한 잔이라도 정성껏 나에게 선물할 수 있는 작은 마음의 여유만큼은 품고 살아야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만의 거친 세상 속에서 지치고 찌들었을 때 생각나는 소중한 비밀 기지나, 마음을 달래주는 진짜 '힐링 푸드'는 무엇인가요? 댓글로 여러분의 솔직한 이야기나 눈물겨운 요리 실패담이라도 좋으니 마음껏 털어놓아 주세요. 오늘 밤은 차가운 폰 내려놓고 정성스러운 음식 얘기로 밤새도록 수다나 따뜻하게 떨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