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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온갖 번지르르한 정의를 외치면서 뒤로는 제 잇속 챙기기 바쁜 세상입니다. 뉴스나 직장에서나 말만 번지르르한 '가짜 리더'들에게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누가 무슨 좋은 말을 해도 심드렁하고 냉소적인 눈으로 보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온몸에 날이 선 채로 주말 저녁 방구석에 멍하니 누워 있다가, 문득 예전에 극장에서 가볍게 웃으며 봤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다시 틀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영리하게 잘 만든 픽션인 줄로만 알았는데, 머리가 굵어지고 가짜들이 판치는 현실 사회를 겪어본 뒤 혼자 조용히 다시 꺼내 보니 스크린 속 풍경이 완전히 다르게 와닿았습니다. 세련된 연출과 흥미진진한 가상 역사 속에 숨겨진 진짜 인간의 탐욕, 그리고 역사라는 거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씁쓸한 진실에 대해 제 솔직한 감정들을 털어놓아 볼까 합니다.

상참의와 매화틀의 생생함, 하지만 그 속에 감춰진 거대한 역사적 착각
영화는 독살 위협에 시달리던 광해군이 자신과 똑 닮은 천민 하선(이병헌 배우)을 대역으로 앉히면서 시작됩니다. 첫 장면부터 왕의 조회인 상참의나 배변 틀인 매화틀까지 조선 왕의 내밀한 일상사를 기가 막히게 세세한 동영상으로 담아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요. 이렇게 고증이 잘된 배경 속에서, 하선이 대동법 확대를 반대하는 사대부들을 향해 호통을 치는 명장면을 볼 때는 가슴이 뻥 뚫리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밤새 노트북으로 진짜 역사를 검색해 보다가 묘한 배신감과 함께 뒷목을 잡았습니다. 영화에서는 마치 광해군이 백성을 끔찍이 아끼는 성군이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역사 속 광해군은 대동법 확대를 본인 스스로 그다지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반대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무리한 대궐 중건으로 백성들을 극심하게 수탈해 원망을 샀던 게 진짜 역사라더군요.
영화 속 하선의 따뜻한 눈빛에 속아 "실제 광해군도 저렇게 좋은 왕이었구나" 하고 철석같이 믿었던 제 무지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자극적인 편집과 짤방에 속아 진실을 오해하고 마는 오늘날 우리의 얄팍한 시선이 영화 속 각색과 겹쳐 보여 씁쓸한 침이 삼켜졌습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부들의 핏대, 내 부끄러운 직장 생활의 줄타기
작중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건, 지는 해인 명나라에 군사를 파병해 사대의 예를 다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신하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나라를 망치는 꼰대 기득권처럼 그려지지만, 당시 기록을 보니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국가 예산의 20%를 퍼부어 조선을 구원해 준 직후였다고 합니다.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은혜를 모르는 왕의 스탠스가 오히려 미쳤다고 보였을 법한, 나름의 묵직한 명분이 있었던 셈이죠.
이 사대부들의 눈치 싸움을 보는데 문득 제 직장 생활의 흑역사가 떠올라 캔맥주가 확 썼습니다. 예전에 회사에서 줄을 잘못 서면 한순간에 밀려난다는 공포 때문에, 뻔히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줄 알면서도 "전통적인 방식과 윗선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라며 다수를 따라 침묵했던 제 비겁한 순간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명분과 생존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덜덜 떨며 대세에 묻어가려 했던 내 모습이, 영화 속에서 허균과 박충서 사이에서 눈치 보며 줄 서던 조정 관료들과 뭐가 다른가 싶어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고 화끈거렸습니다.
아미산 굴뚝과 워프 하는 경복궁, 웰메이드 판타지가 주는 여운
사실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영화는 옥에 티 천지입니다. 광해군 시절에는 허물어져 있지도 않았던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 굴뚝이 배경으로 불쑥 등장하고, 궁궐을 뛰어가던 왕이 갑자기 전주의 경기 전으로 워프 하기도 합니다. 철저한 고증의 사극이라기보다는, 영상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잘 짜인 하나의 '가공의 판타지'인 셈이죠. 도승지 허균을 '대감'이라 부르거나, 종2품인 상선 내관에게 당상관이 반말을 하는 것도 실제 계급 사회의 법도와는 많이 다른 허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왜곡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여전히 뜨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가 현실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진짜 리더의 모습'을 하선이라는 천민을 통해 대리 만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짜 광해군은 성격이 꼬여 국정을 망친 왕이었지만, 영화는 "진짜 왕이라면 백성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줄 줄 알아야 한다"라는 현대인들의 간절한 결핍을 말하고 있습니다.
리뷰를 마치며, 가짜가 진짜를 위로하는 밤
영화의 마지막, 하선이 탄 배가 멀어지고 허균이 먼발치에서 고개를 숙여 깊은 절을 올리는 장면에 이르면 가슴속에서 정체 모를 먹먹함이 왈칵 밀려옵니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그 가짜가 남긴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차마 스크린을 끄지 못하게 만들죠. 가짜가 진짜를 가짜라하는 세상 진짜는 가짜에게 당하는 세상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에 저런 진짜 같은 가짜가 세상에 많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해 보았습니다.
[한 줄 공감]
역사가 왜곡한 성군의 판타지 속에서, 현실 정치에 지친 현대인이 가장 듣고 싶었던 위로를 발견하는 영화.
내일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저는 또 변덕스러운 현실의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며 영혼 없는 미소를 짓고 있겠지만, 적어도 가슴속에는 하선이 보여준 '사람에 대한 따뜻한 예의'만큼은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보며 하선의 호통 속에 어떤 대리 만족과 씁쓸함을 느끼셨나요? 댓글로 솔직한 생각을 나눠주세요. 오늘 밤은 영화 속 숨겨진 옥에 티와 역사 이야기 속으로 달려가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