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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것은 물가였고, 무너진 것은 순서였다
전고운 감독의 첫 장편 <소공녀>(2018)는 흔히 한 여자가 집을 버리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에 놓인 것은 주거 문제가 아니라 훨씬 오래된 질문이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먼저 포기하는가, 그리고 그 포기의 순서는 누가 정해주었는가.
물가가 오르면 사람들은 대개 기호품부터 줄인다. 술을 끊고, 담배를 줄이고, 취미를 미룬다. 월세는 마지막까지 사수해야 할 방어선으로 간주된다. 이 순서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미소는 그 순서를 뒤집는다.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개비의 담배를 남긴 채, 집을 내려놓는다. 이 선택 앞에서 관객이 느끼는 미묘한 저항감의 정체는 미소의 무모함이 아니다. 한 번도 검토해 본 적 없는 자기 삶의 우선순위 목록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데서 오는 당혹감이다.

취향은 사치인가, 존재의 최소 단위인가?
욕구의 위계를 거스르는 선택
인간의 욕구가 생리와 안전에서 출발해 자기실현으로 상승한다는 매슬로의 도식은 널리 인용된다. 다만 이 위계가 실증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비판 역시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미소의 선택은 그 비판을 삶의 형태로 옮겨 놓는다. 그에게 위스키와 담배는 여유의 표식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임을 확인하는 마지막 좌표다. 하단이 흔들려도 상단을 놓지 않겠다는 결정은 비합리로 보이지만, 실은 그 위계가 자연법칙이 아니라 사회가 학습시킨 규범임을 드러낸다. 무엇을 사치로 분류할 권한이 개인에게 있는가, 아니면 사회에 있는가. 영화는 이 질문을 담뱃갑 하나와 위스키 한 잔으로 압축한다.
집을 가진 사람들이 오히려 갇혀 있다
미소가 하룻밤씩 신세를 지는 다섯 명의 옛 밴드 동료는 저마다 집을 가지고 있다. 링거를 꽂은 채 일하는 문영, 시댁의 평가 아래 부엌에 서는 현정, 아파트를 얻는 대신 결혼을 잃어가는 대용, 부모의 집에 머무는 록이, 부유함으로 과거를 덮은 정미. 이들의 집은 안식처인 동시에 울타리다. 록이의 집에서 아침을 맞은 미소가 밖에서 잠긴 문을 발견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서늘한 은유다. 호의와 감금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며, 안정이라는 이름의 구조물은 사람을 보호하는 만큼 붙들어 둔다. 계속 걷는 인물은 집이 없는 미소 한 사람뿐이고, 집을 가진 이들은 한자리에 굳어 있다. 이 구도는 우연이 아니다.
미소가 그 집들에 머무는 방식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는 하룻밤의 잠자리를 공짜로 받지 않고 청소와 밥으로 값을 치른다. 이 호혜의 감각은 그가 지키려는 것이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의 대등함임을 알려준다. 얻어 쓰는 사람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그는 언제나 노동을 먼저 내민다.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지웠는가?
상황에 이름을 다시 붙이는 일
미소는 자신을 갈 곳 없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 중인 사람으로 정의한다. 이를 자기기만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자기를 구성한다는 서사적 정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명명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노숙과 여행 사이에 물리적 거리는 없지만, 두 단어가 만들어내는 태도의 차이는 실재한다. 다만 이 대목을 낭만으로 소비하는 순간 영화는 왜곡된다. 감독은 미소를 승리자로 그리지 않으며, 개인의 태도가 구조적 빈곤의 해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는다.
소유의 목록과 존재의 감각
에리히 프롬은 삶의 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나누었다. 소유의 양식에서 나는 내가 가진 것의 총합이고, 존재의 양식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의 총합이다. 이 기준을 대면 영화의 인물 배치는 한결 선명해진다. 집과 자산을 확보한 인물들은 소유의 목록을 채우는 동안 존재의 감각을 조금씩 잃었고, 미소는 목록이 거의 비어 있는 대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만은 끝까지 알고 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지 영화는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두 양식이 서로 다른 대가를 요구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장 먼저 줄이는 항목들의 공통점
이 영화를 본 뒤 각자의 가계부나 일과표를 펼쳐보면 하나의 규칙이 보인다. 우리가 가장 먼저 삭제하는 항목은 대체로 타인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주거비, 교육비, 보험료처럼 해명 가능한 지출은 끝까지 지키고, 취향과 관계와 혼자 있는 시간처럼 해명이 필요한 것들은 손쉽게 지운다. 결국 우리는 자기 기준이 아니라 남에게 변명할 수 있는 기준으로 삶을 편집해 온 셈이다. 미소가 끝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가 이 편집 원칙을 따르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담담하게 남는 질문
영화의 마지막, 강가의 텐트와 하얗게 센 머리를 두고 해석은 갈린다. 성장으로 읽는 시선과 몰락으로 읽는 시선이 나란히 존재하며, 감독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제목만은 방향을 가리킨다. 원작 동화 속 소공녀 세라는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다. 가진 것의 목록이 사람의 품위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전언이 이 영화의 제목에 겹쳐 있다.
취향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소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가깝다. 무엇을 포기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할 때 사람은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희미해진다. <소공녀>가 오래 남는 이유는 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의 목록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