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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일상은 온통 인스턴트와 배달 음식 천지였습니다. 매일 쫓기듯 마감하는 업무 스트레스에 치이다 보니, 밥을 ‘먹는’ 게 아니라 그저 생존을 위해 ‘밀어 넣는’ 것에 가까웠죠. 그러다 속이 심하게 뒤틀린 어느 주말 아침에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엄마가 몇 년 전에 담가 보내주셨던 시큼한 매실청 유리병을 발견했습니다. 대충 찬물에 타서 한 모금 마시는데, 시큼하고 쌉싸름한 그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신기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더라고요. 내가 내 몸을 참 지독하게도 돌보지 않고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렇게 속을 달래며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생각나 찾아보게 된 작품이 바로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였습니다. 예전엔 그저 예쁜 시골 풍경을 보여주는 영상미 좋은 힐링 영화인 줄만 알았는데, 내 삶이 철저히 번아웃된 상태에서 다시 마주하니 주인공 혜원(김태리 배우)의 손짓 하나, 프라이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 하나가 완전히 다른 무게로 제 심장을 두드렸습니다.

삼색 떡과 밤조림의 온도, 그리고 도망쳐온 우리들의 서툰 계절
영화는 임용고시 낙방과 고단한 서울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활에 지친 혜원이 고향집으로 불쑥 돌아와 사계절을 보내는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는 혜원의 말처럼, 그녀는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눈 속에 파묻혀 있던 배추를 뽑아 뜨끈한 배추 전을 부쳐 먹고, 봄에는 아카시아 꽃을 튀겨 먹으며 스스로를 먹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혜원이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감자 빵을 만들거나 친구들과 삼색 떡을 쪄내며 서서히 마음의 빗장을 여는 그 요리의 전 과정이 참 아련하면서도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영화 속 혜원의 고향행은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낙오이자 도망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매일 출근 전쟁을 치르고 사내 정치에 시달리며 "다 내려놓고 어디론가 증발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하죠. 저 역시 작년 여름, 프로젝트가 완전히 어그러지고 인간관계까지 바닥을 쳤을 때 모든 연락을 끊고 며칠 동안 방구석에 숨어 지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패배자가 된 것 같아 빵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며 스스로를 학대했었는데, 영화 속 혜원은 도망쳐온 그 시골집에서 오히려 정성스럽게 밭을 일구고 사계절의 정직한 온도를 견뎌냅니다. 단순한 줄거리 요약을 넘어, 자연이 주는 순리대로 심고 거두는 그 과정 자체가 겉만 번지르르한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영혼 없는 삶을 조용히 꾸짖는 것 같아 묘하게 부끄러워졌습니다.
밤조림의 달콤함과 배추 전의 서글픔, 내 서툰 홀로서기의 기억들
혜원의 요리 중에서 제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것은 가을날 정성스럽게 껍질을 까서 설탕에 조려내던 밤조림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완성된 밤조림을 입에 넣고 "음, 가을의 맛이다"라며 미소 짓는 혜원의 모습을 보는데, 문득 예전에 제가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던 첫해 겨울이 떠올랐습니다. 요리라곤 할 줄 몰라 인터넷 레시피를 뒤져가며 엉망진창으로 프렌치토스트를 만들다가 다 태워 먹고, 프라이팬을 붙잡고 서글프게 울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때는 왜 그렇게 모든 게 서툴고 외로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에서 혜원이 만드는 요리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홀대했던 서울에서의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자 엄마에 대한 원망을 이해로 바꿔가는 매개체입니다. 시간이 지나야 진정한 단맛을 내는 밤조림처럼, 우리의 인생도 당장 눈앞의 성공이나 합격 통지서가 없더라도 묵묵히 나만의 계절을 버텨내면 언젠가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무언의 위로를 건넵니다. 교과서처럼 " 힘내라"라고 등을 떠미는 대사 하나 없는데도, 혜원이 정성껏 차려내는 1식 3찬의 밥상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용기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다시 겨울을 맞이하며, 당신만의 작은 숲은 어디에 있나요
영화는 사계절을 무사히 보내고 한 뼘 더 단단해진 혜원이 다시금 자신의 인생을 향해 아주 작은 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담담하게 마무리가 됩니다. 자극적인 반전이나 악역이 나오는 스펙터클한 상업 영화는 아니지만, 상영 시간 내내 제 안의 메마른 감성을 아주 부드럽게 채워준 웰메이드 인생 영화였습니다. 배우들의 자극적이지 않고 맑은 연기 톤과 사계절의 아름다운 풍경이 어우러져, 다 보고 나니 마치 아주 정갈한 시골 밥상 한 그릇을 대접받고 일어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줄 공감]
차가운 세상에 체해버린 우리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의 온기로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정성스러운 처방전.
오늘도 영혼 없는 모니터 앞에서 모진 하루를 버텨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팍팍한 빌딩 숲으로 출근해야 하겠지만, 아주 가끔은 나를 위해 정성 어린 음식 한 접시를 선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만큼은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자신만의 소중한 ‘힐링 푸드’는 무엇인가요? 댓글로 소소한 일상 이야기나 요리 실패담이라도 좋으니 마음껏 털어놓아 주세요. 오늘 밤은 따뜻한 음식 얘기로 밤새 수다나 떨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