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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달 날아오는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쉰 적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대리석으로 마감된 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그래도 난 서울에 내 집 한 채 마련했으니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당당한 척 자위하곤 했죠. 하지만 정작 그 속을 까보면 은행 대출 이자에 허덕이며 이번 달 관리비 연체료 몇 푼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찌질한 현실이 버티고 있습니다. 남들 눈에 비치는 '아파트 브랜드'라는 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영혼까지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의 위선적인 단면이 그 종이 한 장 위로 서글프게 겹쳐 보였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부동산 집착에 현타가 제대로 오던 차에,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작품이 바로 엄태화 감독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였습니다. 예전에 이 영화가 극장에 걸렸을 때는 그저 흔하디 흔한 할리우드식 재난 블록버스터 오락 영화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대출금 잔고와 아파트 평수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사는 현실의 쓴맛을 제대로 본 상태에서 방구석에서 다시 꺼내 보니, 스크린 속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광기 어린 눈빛이 전혀 다른 결의 소름 돋는 전율로 제 가슴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영리하게 각색된 화려한 디스토피아 뒤에 숨겨진 진짜 인간의 잔인한 이기주의와, 제 스스로를 자학하게 만들었던 나약한 본성에 대해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조금 털어놓아 볼까 합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광고 포스터
    콘크리트 유토피아 광고 포스터

    이거 완전 우리 아파트 동대표 모임 꼴 아닌가 싶어 보다가 뒷목 잡을 뻔한 황궁 아파트의 암투

    영화는 대지진으로 인해 온 세상이 하룻밤 사이에 폐허로 변해버린 서울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주변의 모든 고층 빌딩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져 내린 와중에, 기적처럼 단 한 곳, '황궁 아파트 103동'만이 온전하게 살아남게 되죠. 영하의 한파 속에서 갈 곳 없는 외부 생존자들이 살아남은 아파트로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평화롭던 주민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과 차가운 공기가 감돌기 시작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며 진짜 피가 거꾸로 솟을 정도로 빡쳤고 동시에 소름이 돋았던 부분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안위와 아파트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영탁(이병헌 배우)을 주민대표로 내세우고 평소에 '바퀴벌레'라고 멸시하던 외부인들을 잔인하게 밖으로 쫓아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번지르르한 구호를 외치며 무고한 사람들을 얼어 죽을 길바닥으로 밀어내는데, 그 사악한 연대감을 지켜보며 기가 완전히 빨려서 나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자신들의 생존이라는 명분 앞에서는 타인의 생명조차 가볍게 짓밟을 수 있다는 인간 본연의 추악한 욕망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파트 내부에서 배급 체계를 갖추고 기여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며, 외부인을 숨겨준 이웃을 색출해 대놓고 조리돌림하는 장면은 참 기가 찼습니다. 그런데 이 킹받는 주민들의 눈치 싸움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이거 완전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주하는 매운맛 현실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 현타가 제대로 왔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외부 차량이 주차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거나, 주변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섞이기 싫다며 등굣길 교문을 막아서는 현실 속 집단 이기주의들. 영화 속 황궁 아파트의 광기는 가상의 재난이 아니라, 부동산 계급 사회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우리 현대인들의 씁쓸한 자화상이었습니다.

    살기 위해 괴물이 되어간 영탁의 폭주, 그리고 내 비겁했던 선택들의 고백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대물림되는 처참한 현실 속에서, 평범한 남편이자 공무원이었던 민성(박서준 배우)이 가족을 지키겠다는 번지르르한 핑계를 방패 삼아 영탁의 폭주에 조금씩 동조하며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은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찢어지는 듯한 서글픈 여운을 남깁니다. 모두가 눈앞의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괴물이 되어갈 때, 홀로 상식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외치며 저항하던 명화(박보영 배우)의 고독한 외침을 보는데, 제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파 오면서 차마 화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당한 인간성 앞에 제 과거의 아주 찌질하고 부끄러운 흑역사가 오버랩되어 얼굴이 화끈거렸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직장에서 윗선들의 명백한 이권 다툼과 부당한 조작으로 인해 한 동료가 억울하게 독박을 쓰고 밀려나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 역시 "내가 나선다고 뭐가 바뀌겠어", "우선 내 밥줄부터 챙기고 봐야지"라는 비겁한 핑계를 대며 철저하게 침묵을 선택했었습니다.

    내 통장 잔고와 안위만 챙기느라 동료의 눈물을 모른 척했던 그날의 이기적인 선택들이, 화면 속에서 외부인을 사정없이 패며 쫓아내던 민성의 서글픈 눈빛 앞에 사정없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영화는 그렇게 거창한 도덕책을 늘어놓으며 정의롭게 살자고 훈계하는 게 아니라, 현실의 이익과 아파트 한 채라는 물질적 집착 앞에 너무나도 쉽게 무릎 꿇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우리들의 뼈를 사정없이 때리다 못해 순살로 만들어 버립니다.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 위에 남겨진 질문,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집의 의미

    이 영화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견고해 보였던 아파트라는 유토피아가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습격으로 인해 한순간에 처참한 디스토피아로 붕괴하는 파국의 순간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콘크리트 성벽이 부서지고, 피투성이가 된 채 쫓겨난 민성과 명화가 아파트 밖의 진짜 인간다운 생존자들을 만나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는 대사를 마주할 때, 방 안의 불을 켤 엄두가 안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거나 영웅이 세상을 구하는 흔한 통쾌한 결말이 아니기에, 영화가 주는 여운은 상영 시간 내내 숨이 막힐 만큼 길고 따가웠습니다. 작은 불의를 모른 척하고, 내 아파트 평수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이기주의의 괴물이 되기 시작할 때, 우리 삶의 소중한 상식과 양심도 서서히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똑똑히 직시하라고 다그칩니다. 인위적인 요약 기호를 모두 걷어내고 완벽한 스토리텔링형 줄글로 인물들의 사투를 따라가니 가슴속 울림이 더 진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내 맘대로 한 줄 평]
    콘크리트라는 화려한 감옥에 갇혀, 아파트 한 채에 영혼을 팔아넘긴 현대인들의 위선과 집단 이기주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서늘한 거울.

    우리는 내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도 여전히 피곤에 찌든 얼굴로 부동산 시황과 주식 계좌 잔고를 확인하며 무기력하고 팍팍한 하루를 시작할지 모릅니다. 또다시 집으로 돌아와 내 주머니 채우는 일에만 골몰하며 타협하듯 살아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주 가끔은, 재난이라는 잔인한 거울이 내 눈앞에 들이닥쳤을 때 나 역시 저 황궁 아파트 주민들처럼 괴물이 되진 않을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음의 여유만큼은 품고 살아야겠다는 단단한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영화를 보면서 이병헌 배우가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고 미친 듯이 포효하던 그 소름 끼치는 명장면에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여러분의 솔직한 관람 후기도 댓글로 남겨주세요. 오늘 밤은 폰 내려놓고 우리들의 씁쓸한 욕망 얘기로 밤새도록 수다나 제대로 떨어봅시다.